국제적 맥락에서 스포츠와 정치
국가의 외교적 활용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도 스포츠는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는 스포츠가 가진 두 가지 성격 덕분이다. 첫째, “스포츠는 정치, 경제, 문화 및 제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규칙 및 행동양식을 지닌 신체 활동으로 개방성이 강하다. 흔히 말하듯 스포츠규칙은 ‘만국공용어’로서 누구나 쉽게 어울리게 할 수 있다. 둘째, 스포츠는 그 놀이성, 유희성이 주는 부차적 성격 덕분에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친선과 우호를 유도할 수 있다.
더욱이 냉전이 종식된 이후의 국제질서에서 전통적인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 못지않게 문화, 이데올로기와 같은 무형의 권력 자원으로서 ‘소프트파워’가 중요해지면서, 그 전략의 한 수단으로서 스포츠의 역할 또한 증대되고 있다. 여기서는 국제정치에서 스포츠의 기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살펴본다.
(1) 외교적 승인: 얼었던 관계를 녹이는 아이스 브레이커 기능
스포츠 교류는 공식적인 외교채널로 풀어내기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에 접근해 나가는 관문으로 역할 한다. 동서냉전기였던 1971년 미국 탁구대표팀의 중국방문은 20년 이상 서먹하던 양국이 교류를 재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 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성사되면서 발표된 상하이 공동성명은 동서 냉전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아이스브레이커’로서의 기능은 남북한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 대치했던 양 체제는 1990년의 남북통일 축구대회 개최 및 1991년의 세계탁구선수권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단일팀을 파견하면서 대화를 유지했다. 2018년 평창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경기에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하기로 한 결정은 2016년 개성공단 중단 이후 오랫동안 경직되어 있던 남측과 북측 사이에 대회를 재개하는 통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이어 개최된 남북한 문화예술교류와 함께 역사적인 2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남북통일농구대회(2018년 7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2018년 8월), 그리고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동시입장과 같은 스포츠교류는 이러한 해빙 모드를 지속하고자 하는 양측의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외교적 항의
영어에서 외교를 의미하는 형용사 ‘diplomatic’이 ‘불쾌함을 일으키지 않는’이라는 뜻을 함께 담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국제무대에서 국가들은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외교적 의사를 표현한다. 직접적이거나 일방적인 의사표현은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고, 그러한 극단적 결과는 해당 국가는 물론 그와 관련된 다른 국가들에도 연쇄적인 경제적, 군사적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한 국가에 대한 지나친 친선표시는 그 국가와 대립하고 있는 다른 국가와의 마찰을 야기할 수 있다. 스포츠는 부차적이고 비정치적인 성격 덕분에 국가가 예민한 국제정치적 이슈에 대해 에둘러 의사를 표현할 때에 적절히 활용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은 항의하고자 하는 국가가 개최 또는 참여하는 국제경기 대회에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거나, 그 국가 선수단의 입국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LA 올림픽은 각기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상대 체제의 중심국가가 주최하는 올림픽에 불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상대 체제에 대한 인정을 거부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이다. 남아공은 인종차별주의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시행한 까닭에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았는데, 이러한 지탄은 주로 스포츠를 통한 간접적 항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주요 국가들이 남아공에서 열리는 스포츠대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남아공 선수들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 참여가 불허됐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행동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는 데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간접적으로 남아공 내에서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3) 국가 이미지 형성: 이미지메이킹(Imagemaking)
전 세계의 국가들은 스포츠를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확보하고자 시도한다. 특히 역사적 과오가 있는 전범국이나 인권 관련 이슈 등으로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스포츠 메가이벤트 유치를 통해 고정관념을 탈피하고자 한다. 세계를 향해 연출하는 쇼로 메가이벤트를 활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미지메이킹을 국가인지도가 낮은 신생독립국이나 수출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활용되는 전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선진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가 이미지메이킹 전략을 사용한다. 선진국의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미지메이킹을 통해 특정한 도시 ‘브랜드’를 구축하고, 그걸 통해 관광수익이나 외국자본의 투자유치를 극대화하고자 시도한다. 예를 들어 도쿄에서 열리는 2020년 하계올림픽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방사능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지역에 경기를 배치함으로써 ‘안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시도 중이다. 올림픽 경기가 열렸다는 사실 그 자체가 관광에 문제가 없는 곳이라는 인상을 줄 것이고, 이것이 피해지역의 경제를 활성화 하는 데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스포츠 메가이벤트의 유치나 스포츠경기에서의 성과를 통한 이미지메이킹은 최근 들어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다만 지구화되고 다각화된 매체 환경은 스포츠 이벤트라는 쇼를 보다 극적으로 활용해 국제관계의 다양한 행위자들에게 어필하려는 국가의 시도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국제 스포츠 거버넌스
국제무대에서 비단 국가들만 스포츠와 정치에 관여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국제경기를 조직, 운영함으로써 스포츠와 정치가 결합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것은 FIFA(국제축구연맹), IOC(국제올림픽위원회), WADA(세계반도핑기구)와 같은 초국적인 스포츠단체들이다. 또한 이러한 스포츠단체는 그들 스스로가 펼치는 정책으로 말미암아 각국의 정부 및 스포츠경기단체, 대륙을 기반으로 한 지역별 스포츠경기단체와 협력 또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국제 스포츠단체의 정치적 영향력에 관해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다.
(1) 관리와 규제
그 유형에 따라 성격이 다르지만 국제 스포츠단체는 공히 지역이나 국가수준의 스포츠경기단체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FIFA와 IAAF(국제육상경기연맹)같은 종목별 국제 경기단체는 상위기관으로서 지역과 국가수준의 경기단체들이 따라야할 경기 규칙과 대회의 운영에 대한 지침을 결정한다. 하위수준의 경기단체들이 규칙과 지침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벌금부과, 대회참여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IOC는 올림픽을 주관하는 스포츠단체로 각 국가나 정부에 국가올림픽위원회(National Olympic Committee, NOC)를 설립해 올림픽 운동의 보급에 앞장선다. IOC 헌장에 따르면, 각 국가의 IOC위원은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달리 IOC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에서 IOC를 대표한다. 같은 맥락에서 각국의 NOC(한국의 경우에는 Korea Olympic Committee, KOC) 또한 IOC에서 각 나라를 대표한다기보다. 각 나라에서 IOC의 올림픽 운동을 대리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IOC의 헌장에 각국에서 NOC가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 또한 국제수준의 스포츠조직이 갖는 규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2) 긴장
때로 국제 스포츠단체의 규제는 국가수준 스포츠경기의 운영방식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올림픽, FIFA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메가이벤트는 그 이벤트를 주관하는 스포츠경기단체의 방침에 맞추어 개최국의 법이나 조례를 개정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는, 민주정부의 법률과 조례 개정에 자격이 없는 주체가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국제 스포츠경기단체는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처럼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자격을 갖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대회가 끝나면 법과 조례 개정으로 인한 결과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른 국가나 UN. IMF와 같은 국제 정치, 경제기구가 규제완화요구를 할 경우 심각한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국제스포츠 경기단체가 ‘스포츠대회’를 통해 유사한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반발이 없는 것을 두고 Zirin(2014)은 스포츠 메가이벤트가 시장의 규제완화를 재촉하는 ‘신자유주의적 트로이의 목마’라고 부른 바 있다.
(3) 인정
국제 스포츠단체는 그것이 가진 초국적 성격 때문에 종종 특정 집단에 대해 정치적 인정에 준하는 수준의 사회적 승인을 내리기도 한다. Grix(2016)에 따르면, 과거 동독은 서독과 분리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국제 스포츠무대에서의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며 국제스포츠 경기단체들로부터 정당한 성원으로 인정받았다. Grix(2016)는 동독이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그들 스스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참조 : 스포츠 메가이벤트의 정치학